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문단 편집) == 개요 == [[파일:Freight-train-tracks-Auschwitz-Birkenau-Nazi-Germany-Oswiecim.jpg]]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Auschwitz Birkenau)'''는 독일 제3제국 최대 규모의 강제 수용소였던 곳입니다. 수용소의 요새화된 벽, 철조망, 발사대, 막사, 교수대, 가스실, 소각장 등은 이곳에서 벌어졌던 대량 학살의 현장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역사적인 연구에 따르면, 대다수가 유대인이었던 1,500,000명의 수용자가 이곳에서 체계적으로 굶주림과 고문을 당한 뒤 살해되었으며, 이는 20세기에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른 잔인한 역사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강제 수용소'''는 주요 사건, 살아 있는 전통, 사상, 신념, 그리고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닌 예술 및 문학 작품 등과 직접적이고 명백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는 나치 독일(1933~1945)이 계획적으로 유대인과 수많은 사람들을 집단 학살한 증거이며, 인간성에 반하여 자행된 범죄 행위의 부정할 수 없는 증거입니다. 이 수용소는 자유로운 행동과 사상을 억압하고 한 민족 전체를 말살하려고 했던 나치 독일의 시도에 끔찍한 역경 속에서도 끝까지 저항했던 강한 인간 정신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 유적은 유대인 대학살, 인종차별 정책, 인간의 야만성을 전 인류에게 상기시키는 주요 장소이며, 또한 인류 역사의 어두운 한때에 관한 기억이 모여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 곳이자, 과격한 사상이나 인간 존엄성 부정이 가져올 수많은 위협과 비극에 대한 경고의 장이기도 합니다. >---- >-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세계유산]] 목록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강제 수용소" 中. [[http://heritage.unesco.or.kr/%ec%95%84%ec%9a%b0%ec%8a%88%eb%b9%84%ec%b8%a0-%eb%b9%84%eb%a5%b4%ec%bc%80%eb%82%98%ec%9a%b0-%eb%8f%85%ec%9d%bc-%eb%82%98%ec%b9%98-%ea%b0%95%ec%a0%9c-%ec%88%98%ec%9a%a9%ec%86%8c-%eb%b0%8f/|#]] [[나치 독일]]의 노동 수용소[* 제1 수용소 아우슈비츠, 제3 수용소 모노비츠.]이자 절멸 수용소.[* 제2 수용소 비르케나우.] 헤움노 수용소 및 라인하르트 작전 절멸 수용소들과 함께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을 수행했던 핵심 시설 중 하나이다.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서쪽으로 50km 지점에 있는 작은 공업 도시인 오시비엥침(Oświęcim)에 위치해 있다.[* 이 때문에 [[북한]]에서는 '오슈벵찜'이라고 부른다.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령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소속의 국경 도시였지만, [[1919년]] 제국이 멸망한 이후 [[폴란드]]령이 되었다. 아우슈비츠는 [[독일어]]로 읽은 이름이다.] 현재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있으며 유네스코가 등재한 정식 명칭은 Auschwitz Birkenau German Nazi Concentration and Extermination Camp (1940~1945), 즉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폴란드어]]로는 오시비엥침-브제진카(Oświęcim-Brzezinka)) 나치 독일 강제 말살 수용소이다. [[파일:Holocaust Poland.png|width=600]]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한 [[폴란드 제2공화국]] 영토 내에서 벌어진 홀로코스트. 절멸 수용소들은 해골이 들어간 검은 사각형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그 중 좌측 아래 [[크라쿠프]] 근교에 있는 것이 아우슈비츠 수용소다. 그 외 검은 사각형들은 절멸 수용소들을 제외한 여타 수용소들, 육각성은 [[게토]], 검은 배경이 없는 해골은 집단 학살 발생지이다. '아우슈비츠'는 독일이 세운 수많은 절멸 수용소 중 하나이지만[* 주요 절멸 수용소는 6개로,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외에 트레블링카, 베우제츠, 소비보르, 헤움노, 마이데네크가 있었다. 그리고 이들 이외에도 말리트로스테네츠, 야세노바츠 등이 존재했다.], 규모가 큰 데다 무엇보다 증거가 되는 시설이 상당부분 남았기 때문에 독보적으로 유명하여 절멸 수용소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에게 아우슈비츠는 고유 명사로 쓰이기보단 '나치의 절멸 수용소'를 뜻하는 보통 명사로 쓰인다. 아우슈비츠가 아닌 다른 수용소를 배경으로 하거나 작품 속 배경이 아우슈비츠인지 확실하지 않은 작품들도 종종 아우슈비츠가 배경이라고 설명되는 이유다. 90만 명이 학살당한 [[트레블링카]], 60만 명이 학살당한 [[베우제츠]] 등[* 트레블링카, 베우제츠, 소비보르, 헤움노는 완전한 절멸 수용소로서 분류 작업이 없었기 때문에 '노동 가능인원'으로 분류되어 잠시라도 살아남을 여지가 없었다. 따라서 이들 수용소에서는 [[1943년]]까지 학살 속도가 아우슈비츠보다 빨랐다. 마이다네크는 아우슈비츠처럼 절멸-노동 수용소인 데다 규모가 작았기 때문에 희생자 수가 앞서 열거한 수용소들보단 적었다. 1943년 말 앞서 열거한 수용소들은 라인하르트 작전의 종료로 마이다네크를 제외하고 모두 폐쇄되었는데 이 때문에 아직 살아남아있던 유대인들이 거의 대부분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로 이송되었다. 이때부터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의 학살 속도는 본격적으로 빨라져서 점차 '순수' 절멸 수용소의 성격을 띄게 되었다. 한편, 폐쇄된 수용소들 중 헤움노 수용소는 1943년 말 폐쇄된 뒤 우치 게토에 남아있던 약 3만의 유대인을 학살하기 위해 [[1944년]] 6개월간 다시 가동되었다.] 아우슈비츠에서의 희생자 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절멸 수용소들이 있었지만 이 절멸 수용소들은 [[소련군]]이 당도하기 한참 전인 1943년에 폐쇄되었기 때문에 [[나치]]는 이 수용소들에 관한 증거를 완전히 인멸했고, 따라서 구조물이 남아있지 않다. 이 때문에 이들 수용소는 그 악명이 아우슈비츠보단 덜 알려져 있다. 절멸 수용소의 경우, 보통의 노동 교화소나 강제 수용소와는 달라서 오로지 반 나치 성향이 의심되는 세력을 절멸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세워진 곳이었다. 절멸 수용소 역시 넓게는 강제 수용소의 범주에 들어가지만 나치는 절멸 수용소(Vernichtungslager), 또는 죽음의 수용소(Todeslager)라는 용어를 혼용해서 사용하며 행정적으로도 이들 절멸 수용소와 기타 강제 수용소를 구분했다. 또한 다른 강제 수용소의 존재는 필사적으로 숨기거나 하지 않았지만 절멸 수용소만큼은 그 존재를 일급 기밀로 다뤘고 적이 당도하기 전에 어떻게든 없애버리려 했다. 대부분의 경우 절멸 수용소에서는 '분류 작업'이 존재하지 않았거나 존재하더라도 소수만 노동 가능 인원으로 선발하던 곳이었다. 아우슈비츠의 경우,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노동 가능인원으로 분류되는 인원은 10~20%에 불과했던 데다 최종적으로 사망 확률이 85%에 이르렀기 때문에 절멸 수용소에 훨씬 가깝다. 분류작업이 아예 없던 [[소비보르 절멸수용소|소비보르]]는 99.98%, [[베우제츠 절멸수용소|베우제츠]]의 경우 99.989%,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트레블링카]]의 경우 99.993%, [[헤움노 절멸수용소|헤움노]]의 경우 99.996%였다. 절멸 수용소가 아닌 노동/강제 수용소의 사망율은 수용소마다 크게 달라서 15%(작센하우젠) ~ 59%(슈투트호프)였고, '노동을 통한 절멸'을 시행하던 곳으로서 유대인과 함께 [[정치범]] 등 '바람직하지 못한 자', 피지배 지역의 엘리트들, [[전쟁포로]] 등도 주요 수감자였다. 참고로 말라 비틀어진 시체가 가득 쌓인 수용소의 전경을 촬영한 비디오[* 대표적인 것이 다하우와 부헨발트, 베르겐벨젠 수용소의 영상들이다.]는 홀로코스트의 끔찍함을 보여줄 때 많이 활용되는 시각 자료다. 하지만 이 비디오들은 거의 전부 절멸 수용소가 아닌 강제/노동 수용소에서 촬영된 것으로, 이 시체들은 죽을 때까지 노동하다 기아와 질병으로 결국 사망한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수용소 안에 시체가 쌓인 이유는 전쟁 막바지까지 운영되던 노동 수용소가 미처 시체를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수용소보다 희생자 수가 월등히 많았던 절멸 수용소들은 홀로코스트의 뼈대를 이루었음에도 나치가 증거를 집중적으로 파기한 탓에 남아있는 시각 자료가 거의 없다. 절멸 수용소의 학살 시퀀스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시각 자료는 단 한 가지,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에서 [[존더코만도]]가 극비리에 촬영한 나체로 가스실로 끌려가는 여성들, 시체를 화장하는 모습을 찍은 4장의 사진이 유일하다. 홀로코스트의 주된 방식은 노동 수용소와 같은 곳에서 죽을 때까지 일하다 말라 비틀어져 죽는 것보다는, 잡힌 직후 집단 [[총살]]을 당하거나 '''절멸 수용소로 보내진 직후 가스로 살해되고 시신은 불태워져 그 재가 땅에 묻히거나 강물에 떠내려가는 것이었다.''' 현재를 살아가는 보통 사람이 이 끔찍함을 시각자료 없이 상상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